◇ 시

이화우 흩날릴 제… 이매창

13월에부는바람 2013. 6. 20. 15:51

 새벽江 혹은 13월에부는바람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이매창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할까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노라

 

 

내 정령(精靈) 술에 섞여 님의 속에 흘러들어

구곡간장(九曲肝腸)을 마디마디 찾아가며

날 잊고 님 향한 마음을 다스리려 하노라

 

 

기러기 산 채로 잡아 정들이고 길들여서
님의 집 가는 길을 역력(歷歷)히 가르쳐 주고
한밤중 님 생각날 제면 소식 전케 하리라

 

 

등잔불 그무러갈 제 창 앞 짚고 드는 님과

오경종(五更鐘) 나리올 제 다시 안고 눕는 님을

아무리 백골이 진토된들 잊을 줄이 있으리

 

 

내 가슴 흐르는 피로 님의 얼굴 그려내어

내 자는 방 안에 족자 삼아 걸어두고

살뜰히 님 생각날 제면 족자나 볼까 하노라

 

 

하룻밤 봄바람에 비가 오더니

버들과 매화가 봄을 다투네

이 좋은 시절에 차마 못할 건

잔 잡고 정든 님과 이별하는 거라오

매창집(梅窓集)

 

 

 

 

기다리는 女心 / 계은숙

 

 

 

 

 

 

 

 

 

 

 

 

 

 

 

 

한시의 대가인, 매창의 님 유희경은 천인 신분으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양반이 되었대요.   한양

로 떠난 님을 그리워하는  한글 시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부안에 있는 매창 추모비에 새

답니다.

 

 

 

 

용산전망대에서 보는 순천만 II                                             새벽강의  2010 썸머 IV / 순천만에서

 

 

 

 

 

 

 

 

 

 

조선 시대 수많은 여류 시인들이 있었고, 그녀들이 남긴 시문집 또한 여러 권이 되지만, 그 중에서도 군계

계일학은 양반집 규수로는 허난설헌이 으뜸이고, 기생으로는 황진이와 이매창이 쌍벽을 이룬다.

 

황진이가 남긴 한시는 3 - 4 편에 불과하고, 우리말로 쓴 시조 역시 많지는 않다.   어찌 보면 황진이는 한

아닌 한글로 쓴 시조가 걸작이고, 이 분야에 있어 일인자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이매창은 한시(漢詩)

있어서는 조선 최고의 작가라 할 수 있는데, 황진이를 능가하는 일면을 보여 주고 있다.

 

이매창은 전북 부안현의 아전 이탕종의 딸로 1573년에 태어나 여자로서 한창 나이인 38살인 1610년 늦은

에 죽었다.  본래의 이름은 계생 또는 계량이고 호를 매창으로 하였다.     매창은 한 남자를 만나 지아비

모시며(이조시대에는 이렇게 표현했다.)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할 수 없었기에, 매창 나이 18살에  처음

나 알게 된  28살 연상의 촌음 유희경을 첫사랑이자 평생의 연인으로 삼았다.  매창은 부안에 살고 촌음

한양에 살아, 처음 만나 정을 통하고 헤어져 다시 재회까지 무려 15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지만, 매창의

가슴속에 시종일관 변함없이 남은 남자는 유희경밖에 없었다.

 

물론 유희경이 한양으로 떠나고 15년 세월 동안 당시 김제 군수인 묵재 이귀와 정인(情人 정을 통한 사이)

사이였고, 교산 허균(홍길동전의 저자. 허난설헌의 친동생. 동인의 영수 초당 허엽의 3남)과  정신적 사랑

은 했지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일편단심 하나로 남은 남자는 오로지 유희경이었다.    정을 주고 떠나

서 오지 않는 님을 기다리며, 일생을 외롭게 독수공방으로 보내야 했던 매창.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고

있는 절창의 한시들은 한 여인의 이러한 삶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기생으로서 최고로 착한 여자가 이매창이고, 남자를 유혹하여 연애 잘 하기로  첫손가락에 꼽히는 여자는

진이. 독하기로 유명한 여자가 소춘풍. 남자와 지고지순한 사랑을 한 여자는 홍랑이었다.

 

이매창은 한시와 거문고, 노래에 있어 당대 최고일 뿐만 아니라, 한시에 있어서 섹시함, 세련됨, 감정표현

의 자연스러움 등은 조선 오백년을 넘어 한민족 5천년 역사에서 여류로서 최고수였다.

 

제사 지내줄 자식이 없었기에, 죽어서도 거문고와 함께 부안읍 공동묘지에 묻혔고, 매창을 사랑하는 나무

꾼, 남사당패들이 해마다 매창이뜸에서 그녀의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살아생전에 수백 편에 달했다는

는 고작 58수만이 부안 고을의 아전들에 의하여 암송되다가 그녀의 사후 58년이 지나서 목판으로 출

되어 오늘에 전해져 오고 있다.                                                                                         카페에서

 

 

 

 

매창 '매창집(梅窓集)' …  전북 부안.        이별이 운명인 시기(詩妓).       연모의 노래는 지금도

 

봄날 하얀 배꽃이 질 때는 눈이 내리는 것 같다.  부안의 시기(詩妓) 매창(梅窓 1513~1550)은 흩날리는

을 보고 이화우(梨花雨)라고 불렀다. 그의 마음에 눈물비가 내리고 있었던 탓이다.  연인을 떠나보낸 날

지는 배꽃은 그에게 애처로운 빗줄기로 보였으리라.

 

장마철의 어둑한 비구름이 조금씩 걷힐 무렵 전북 부안에 도착했다.    번잡스런 도시 모양을 닮아가는 부

감싸안은 성황산이 눈에 들어온다.   성황산 기슭의 서림(西林)공원은 매창의 시비가 자리한 곳이다.

시비는 1974년 이 고장 태생인 문필가 김태수(金泰秀 작고)가 세운 것이다.    앞부분에 매창이 남긴

시조인 '이화우'를 새겼고, 뒷부분에는 매창의 행적을 기록했다.

 

시비 위쪽에는 매창이 앉아 거문고를 타곤 했다는 바위 '금대(琴臺)'가 있다.    주변의 너럭바위들은 오래

고장의 현감, 시인들이 각명해 놓은 시구로 가득하다.    이곳은 매창과 시인들이 시회(詩會)를 열었

소이다.      매창 시비를 세운 김태수의 아들인 김민성(金民星) 부안문화원장은 "지금 이곳에매년

노인들이 모여 전국 시조회를 개최하고, 초중고교생들이 '매창백일장'을 열고 있다" 고 전했다.

 

이화우는 매창이 19세 되던 해에 만난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과 멀어진 뒤 지은 작품이다.  촌은은 천

출신이지만 청절(淸絶)한 시문(詩文)으로 이름을 날렸던 인물.   1532년 부안에 내려온 그는 명기 매창

나게 된다.    용모는 뛰어나지 않았지만 한시와 거문고에 능하고 성품이 바른 매창을 가까이 하면서

촌은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파계했다"(촌은집)

 

깊은 정분을 나누었던 두 사람은  2년 뒤  촌은이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헤어지게 된다.   사랑하는 님과 이

한 뒤 매창은 고통스런 심정을 시조와 한시로 달랬다.  후세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곡원

(歌曲源流)' 에 남겨진 한글시조 이화우 이지만, 그가 남긴 글은  이화우 한 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시다.

 

기생으로서는 이미 늙은 나이인 28세에 매창은 허균(許筠)을 만났다.   허균은 전국 방방곡곡을 기생들과

돌아다니는 난봉꾼이었지만  매창의 한시와 노래, 거문고에 반해  10년 동안 '정신적인' 교분을 나눴

다.  그는 매창의 재주를 사랑했고 절조 높은 뜻을 헤아려 오랫동안 시들지 않는 관계를 유지했다. 매창의

말년 세계가 도선 사상에 가까워진 것도 허균의 권유에 힘입은 바 크다.    '증우인(贈友人)'이라는 시에

매창은 허망한 이승생활에 집착하지 않고 초월적인 선계(仙界)를 지향하는 태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술병 속의 세월은 차고 기울지 않았지만/   속세의 청춘은 젊음도 잠시일세/    후일상제께로 돌아가거든/

옥황 앞에 맹세하고 그대와 살리라(壺中歲月無盈缺  塵世靑春負小年   他日若爲歸紫府   請君謨我玉皇前)

한평생 부안을 떠나지 않은 매창은, 말년에 이르러 외로움과 눈물로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한시로 노래

했다.

 

독수공방 외로워 병든 이 몸이/   굶고 떨며 사십 년 길기도 하지/    인생을 살아야 얼마나 사는가/    가슴

글퍼 하루도 안 운적 없네(空閨養拙炳餘身  長任飢寒四十春   借間人生能幾許  胸懷無日不沾巾)    기생

운명이 그러하다.   유난히 섬세한 감정을 타고 났지만 신분의 제약이 그의 운신(運身)을 옭아맸다. 

만 하면 떠나고 마음 붙일만 하면 헤어지는이별을 받아 들여야 했다.   마음의 고독과 육신의 질병에 시

달리매창은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1668년 부안에서 가장 큰 절인 개암사(開岩寺)에서 매창을 기리며  ‘매창집(梅窓集)’을 발간해  그의 한시

57수를 후대에 전하게 됐다.        부안 사람들이 매창에게 갖는 정은 각별하다.  백발 노인부터 나이 어린

까지 ‘매창 할머니’라고 부르며 매창의 한시를 읊는다.

 

부안읍에서 주산면 쪽으로 2㎞쯤 가다 보면  오리현 아라지 방죽을 곁에 둔  매창공원이 있다.   매창의 무

있는 곳이다.  부안 사람들은 이 무덤이 있는 곳을 ‘매창뜸’이라고 부른다.     매창이 죽은 뒤 45년 만

1655년 무덤 앞에 작은 돌비석이 세워졌다.   매창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나무꾼과 농사꾼 같은보통 사

세운 것이다.     매창뜸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누구라 할 것 없이  해마다 서로 벌초를 하며  매창이

를 다듬었다.  그만큼 부안 사람들이 매창의 거문고와 시를 사랑하고 아낀다는 뜻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비석의 글이 이지러지고 못쓰게 되자,  1917년 부안 시인들의 모임인  ‘부풍시사(扶風詩

社)’ 는  ‘명원이매창지묘(名援李梅窓之墓)’ 라  새겨진 비석을 다시 세웠다.                 다시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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