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江 혹은 13월에부는바람
폭설(暴雪) 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 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날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곰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 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宇宙)의 미아(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오탁번 시인이 손수 만든 개집
오탁번 시인. 소설과 담을 쌓았고 담배를 맛있게 피우는 골초다.
오탁번 시인 충북 제천 출생(1943. 7. 3) 고려대학교 영문과와 동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1966 철이와 아버지)으로 데뷔.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1967 순은
이 빛나는 아침에), 대한일보 신춘문예(1969 처형의 땅)에 소설을 당선시킨 신춘문예 3관왕이다.
시집 / 아침의 예언,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생각나지 않는 꿈, 겨울강 등. 소설집 / 처형의 땅,
새와 십자가, 내가 만난 여신, 절망과 기교, 겨울 꿈은 날 줄 모른다, 저녁연기 등. 그밖의 저술
로는 '한국현대시사의 대외적구조' '현대시의 이해' 등이 있다. 시 전문 계간지 '시인' 창간(1998).
정지용문학상(1997), 한국문학작가상, 동서문학상, 한국시협상 등을 받았다.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교수.
낭송 이인철 배우. 연극 '아가씨와 건달들' '돈키호테' '킹 데이비드' '미녀와 야수' 등에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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