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어디쯤 봄이 오고 있을까 / 이외수

13월에부는바람 2013. 6. 10. 13:41

 새벽江 혹은 13월에부는바람

 

 

어디쯤 봄이 오고 있을까         이외수

 

 

 

 

 

 

1

안개꽃은 싸락눈을 연상시킵니다

 

그대가 싸락눈 내리는 날 거리에서 고백도 하기 전에

작별한 사랑은 어느날 해묵은 기억의 서랍을 떠나

이 세상 어딘가에 안개꽃으로 피어나게 됩니다

 

아무리 방황해 보아도 겨울은 끝나지 않습니다

 

불면 속에서 도시는 눈보라에 함몰하고

작별은 오래도록 아물지 않는 상처가 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랑이 꽃으로 피어나게 된다면

그대가 싸락눈 내리는 날 거리에서 고백도 하기 전에

작별한 사랑은 아무래도 안개꽃으로 피어나게 되지 않을까요

 

 

2

어디쯤 봄이 오고 있을까

잠결에도 내다 보는 유리창 바깥

그대 홀로 먼 길을 떠나는 겨울이 아직도 깊어

걸음마다 백엽식물로 번성하는 성에의 수풀

 

 

 3

비록 절름거리며 어두운 세상을 걸어가고 있지만요

허기진 영혼 천길 벼랑 끝에 이르러도

이제 절망 같은 건 하지 않아요

 

겨우내 자신의 모습을 흔적없이 지워 버린 민들레도

한 모금의 햇빛으로 저토록 눈부신 꽃을 피우는데요

 

제게로 오는 봄 또한 그 누가 막을 수 있겠어요

 

 

 4

구제불능이지요

아무리 세공을 해 보아도 보석이 되지는 않아요

 

다만 햇살 따가운 봄날에

그대 집 마당가로만 데려다 주세요

 

눈길 한 번 주지 않아도 종일토록 흐르는 강물소리

누구의 영혼을 적시는지 가르쳐 드리겠어요

 

 

 5

온 세상 푸르던 젊은 날에는 가난에

사랑도 박탈당하고

역마살로 한 세상 떠돌았지요

 

걸음마다 그리운 이름들이 떠올라서

하늘을 쳐다보면 눈시울이 젖었지요

생각하면 부질없이 나이만 먹었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알 수 있지요

그리운 이름들은 모두 구름 걸린 언덕에서

키 큰 미루나무로 살아갑니다

바람이 불면 들리시나요

그대 이름 나지막히 부르는 소리

 

 

6

아무리 정신이 고결한 도공이라도

영원히 깨지지 않는 도자기를 만든 적이 없듯이

아무리 영혼이 순결한 사랑이라도

언젠가는 금이 가고 마는 줄 알면서도

칸나꽃 놀빛으로 타오르는 저녁나절

그대는 무슨 일로 소리죽여 울고 있나요

 

 

7

유년의 여름날 초록 풀밭에 누우면

생시에도 날아가는 새들의 영혼이 보였다

그 시절에는 날마다 벽에다 금을 그으며 내 키를 재 보았다

그러나 내 키는 조금도 자라지 않았다

단지 날아가는 새들의 영혼만 조금씩 길어지고 있었다

 

 

8

지난 밤

그대에게 보내려고 써 둔 엽서

아침에 다시 보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어

성냥불을 붙였다

끝까지 타지 않고 남은 글자들 

외. 로. 움.

 

 

9

마음을 비우면

인생이 아름다워진다는 말을 누가 믿으랴

 

젊은 놈들은 모두

구정물처럼 혼탁해진 도시로 떠나 버리고

마을 전체가 절간처럼 적요하다

 

기울어지는 여름 풍경 속에서

하루 종일 허기진 그리움으로 매미들이 울고 있다

평상에 홀로 앉아 낮술을 마시는 노인의 모습

이따금 놀빛 얼굴로 바라보는 먼 하늘이 청명하다

 

인생이 깊어지면 절로 구름의 거처를 묻지 않나니

누가 화답할 수 있으랴

부처가 연꽃을 들어 보이지 않아도

노인이 먼저

입가에 떠올리는 저 미소

 

 

10

가을밤 산사 대웅전 위에 보름달 떠 오른다

 

소슬한 바람 한 자락에도 풍경소리 맑아라

 

때로는 달빛 속에서 속절없이 낙엽도 흩날리고

때로는 달빛 속에서 속절없이 부처도 흩날린다

 

삼라만상이 절로 아름답거늘

다시 무슨 깨우침에 고개를 돌리랴

 

밤이면 처마 밑에 숨어서

큰스님 법문을 도둑질하던 저 물고기

지금은 보름달 속에 들어 앉아 적멸을 보고 있다

 

 

11

이제는 마른 잎 한 장 조차 보여 드리지 못 합니다

버릴수록 아름다운 이치나 가르쳐 드릴까요

기러기떼 울음 지우고 떠나간 초겨울 서쪽 하늘

날마다 시린 뼈를 엮어서 그물이나 던집니다

보이시나요 얼음칼로 베어 낸 부처님 눈썹 하나

 

 

12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지나간 날들은 망실되고

사랑한 증거도 남지 않았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자폐증에 빠져 있는 겨울 풍경 속으로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리면 시간이 깊어진다

인생은 겨울밤 얼음 밑으로

소리 죽여 흐르는 강물이다

 

 

13

부끄러워라

내가 쓰는 글들은

아직 썪어 가는 세상의

방부제가 되지 못하고

내가 흘인 눈물은

아직 고통받는 이들의

진통제가 되지 못하네

돌아보면 오십 평생

파지만 가득하고

아뿔사

또 한 해

어느새 유채꽃 한 바지게 짊어지고

저기 언덕 너머로 사라지는 봄날이여

(봄날은 간다)

 

 

14

동자가 먹을 갈다 스승에게  물었다

이 세상 어디에 선계가 있습니까

스승은 말없이 먹을 찍어

중천에 두둥실 보름달 하나를 걸어두고

텅 빈 화선지 속으로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15

그대는 오지 않았다

사랑이 깊을수록 상처도 깊어

그리움 짙푸른 여름 한나절

눈부시게 표백되는 시간을 가로질러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음악으로 멀어지는 강물소리

 

 

 

 

어디쯤 가고 있을까 / 전영

 

 

 



 

 

해와 달님이 담은 북한강이에요

 

 

 

 

 

 

 

 

벽강20  누가 알았으리. 내 젊은 날 그리 좋아하던 외수(오늘은 왠지 그렇게 부르고 싶다)를 오늘 이

룸에서 만나게 될 줄을.     키 큰 미루나무 부등켜 안고 있는 그림과, 그 그늘에 깔린 글을 보면 아직

어든다.  꽃하늘지기님, 복사꽃 그 하늘을 꼭 지켜 주셔요.                           2004. 1. 31(土)

 

병남12  맘속에 있지요  요즘은 도울선생이 밝은 길을 열어주데요  언제까지나 빼곡히 그 하늘 으시..


양기섭21  문득 라즈니쉬의 명언중에 '모르지기 자살하라, 그로인해 생명하라 그러므로 마침내 자유할

이다' 란 말이생각나는군요., 선배님은 아마 자신을 낮추었으므로 영원한 생명과 평온한 자유를 얻었으리

라 믿습니다.,헌데요 선배님 나를 낮추기전에 다른 님들의 낮춤보셔서 또다른 자유를 얻으리라 생각됩

니다.,   선배님의 함자를 귀여운 후배가 기억하고 갑니다-..,  보너스로 꼬리말을 달라준 선배님들도 함께

요......^^*    여기는 어딘가에 포근한 사랑들이 쉼쉬고 있는듯 따뜻한 맘들이 가득합니다..,             2004

 

이영현12  그렇구 말구요.  모두가 우리가 만든 관념들이니 다른 이들의 자유도 귀하게 여기나이다.  공감

는 부분들을 듣는거지만 내자신에게 들려주는 거랍니다.  그 관심 또한 감사.                         중딩카페

 

새벽강20  '이제 절망 같은 건 하지 않아요   겨우내 자신의 모습을 흔적없이 지워버린 민들레도   한

모금의 햇빛으로 저토록 눈부신 꽃을 피우는데요   제게로 오는 봄 또한 그 누가 막을 수 있겠어요'    미루

나무와 민들레 사이 외수의 시를 새벽에 옮겨 심었어요                                                           풍물방

 

서행숙24  ...하늘을 처다보면 눈시울이 젖었지...  봄이 오고있는 하늘을 바라봅니다.           2004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