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江 혹은 13월에부는바람
아저씨 마지막으로 가라사대 윤용인
삶은 얼마나 근사한가… 아저씨들, 웃어요!
보기만 해도 훈훈한 꽃미남 배우의 영화 덕분에, 요즘 '아저씨' 라는 단어가 느닷없이 뭇 여성들의 찬사를
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아저씨'라 발음하면 입 안에는 군내가 돈다. 그러니까 아저씨라는 호칭에는 시간
상으로 이미 싱싱한 전성의 시대를 지나, 외형적으로 유선형의 몸매와 유난히 큰 음성, 그리고 약간은 느
끼하고 번들거리는 눈빛이 연상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세상의 아저씨들이 자신의 외모가 영화 속 '아저씨'를 닮지 않았음에도 좌절을 하냐하면, 사실
그렇지 않다.
김태희가 '아줌마' 라는 영화를 찍는다고 한들 진짜 아줌마들이 열등감을 느낄 리가 없는 것처럼, 아저씨
들 역시 영화 속 가공의 인물에 자신을 비교할 만큼 한가하거나 유아적이지 않다. 오히려 남들이 아저씨
라 불러주고, 자신이 아저씨라 인정할 때 체념과는 다른 편안함이 있다. 아줌마든 아저씨든 가슴 속 밑바
닥에는, 인생의 거친 수풀을 헤치고 여기까지 온 것에 대한 한 자락씩의 자긍심은 있다.
아저씨가 스스로 아저씨 됨을 고민할 때는, 외형이 아닌 내면의 변화를 스스로 감지할 때다. 한때는 정의
의 칼을 번뜩이며 세상의 불의함에 핏줄을 세웠던 청년의 시절도 있었고, 지금도 그 감성은 여전하리라고
생각했지만, 어느때부터 분노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에 당황한다.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틀린
것도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들면서 양비론자로 변하는 것은 아닌지를 슬쩍 의심한다. 왜 갑자기 착해진 것
인지 누군가를 욕하는 것도 싫고, 욕하는 것을 보는 것도 싫어서 뉴스를 슬며시 끄기도 한다. 시나브로 속
물로 늙어갈까 봐, 어느 틈에 '꼰대'가 돼버릴까 봐 아저씨는 가끔씩 홀로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2년 8개월의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아저씨 가라사대' 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연재하면서 나는 아저씨를 밝
고 경쾌하게 그리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했다. 몸의 변화가 순리적이듯, 정신의 보수(保守)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했다. 다만, 보수는 '무언가 지킬 가치가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나를 포함한 이 땅의
아저씨들이 저마다 간직할 수 있는 가치 하나씩은 주머니 속에 넣고 다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고, 가진 것이 많다는 것이 가치는 아닐 것이다. 살아 있는 한 자신을 돌아보고 성
찰하면서, 내 생각이 언제든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아저씨의 삶은 얼마나 근사한가. 그 정신의 토양 위
에 여유와 유머가 함께한다면 그거야말로 영화 속 '아저씨' 보다 더 멋진 아저씨가 아닌가,라고 나는 아저
씨의 가치를 생각했던 것이다.
'안녕' 이라고 말할 때 질질 짜는 것은 궁상이므로 해맑은 경박함으로 마지막 인사를 드린다. 때로 생각
의 짧음과 표현의 부족으로 경쾌함이 무례함으로 비친 적도 있었을 것이다. 넓은 마음으로 부디 용서하시
길. 필자의 부족한 글에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았다거나 아저씨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면, 대대
2010. 9. 15(수) 조선일보 A22 문화면 우하귀 박스 포장. 윤대표의 마지막 선물을 새벽강이
수작업으로 옮기다. 연재글 타이틀은 끝까지 '아저씨 가라사대'였다고 덧댑니다. 2010. 10. 12(화)
순천만 새벽강의